“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서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인도에서의 선교사
  
2002년 인도 연합대성회를 통하여 우리는 인도가 사도 도마의 순교지인 것을 알았다. 1500년대 초에 유럽이 아시아대륙을 식민지화하였을 때,  네스토리안 기독교가 이미 인도 남부해안 특히 고아와 케랄라에 퍼져 있었다. 사도 도마가 실제로 그 교회를 세웠는가 하는 것은 불확실하지만, 그 교회는 ‘성 도마 기독교인’이라고 불려졌다. 포르투칼이 1510년에 고아에 정착하였을 당시, 그들의 첫 번째 임무중 하나는 네스토리안들을 로마 카톨릭으로 개종시키는 것이었다. 1534년 교구가 세워지면서 포르투갈 행정당국은 개종한 네스토리안들을 이슬람 침략자들로부터 군사적으로 보호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베풀었다는 소식이 유럽에 전해지면서 카톨릭의 선교사역이 확대되었다. 선교사 사비에르는 십계명과 주기도문, 다른 로마 카톨릭의 기도문 등을 타밀 혼합어로 번역하여 첫 달에는 1만 명이 넘는 개종자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인도는 네덜란드령에 속하였으므로, 네덜란드 할레 선교회(the Danish Halle Mission)의 루터교 선교사들이 활약하였다. 특히 1706년에 하인리히 플루차우(Heinrich Plutschau)와 바르톨로메 지게발크(Bartholomaes Ziegenbalg)는 트란케바르를 향해 출발하였다. 그들은 타밀어를 습득하여 성경 번역작업을 착수하였고, 마침내 타밀어로 된 신약성경을 완역했다. 네덜란드 할레 선교회는 약 120년 동안 사역을 계속하였다.

영국의 구두 수선공

윌리엄 캐리는 1776년 8월 영국의 노스햄프뎐셔의 폴로스푸리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캐리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밖에 못 다닌 작은 체구에 머리도 벗겨진 보잘것없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그는 주인의 돈을 훔치고 거짓말을 하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수치와 양심의 가책을 받은 캐리는 하나님께 기도 드렸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 죄를 깨끗하게 해 주시면 앞으로 모든 악한 행위로부터 떠나겠습니다.” 얼마 후 함께 일하던 윌리엄 워드의 초청으로 예배를 참석하게 되었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다. 캐리는 일을 하면서도 옆에 성경을 펴 놓고 틈틈이 성경을 읽으며 성실히 일했다. 어느 덧 평신도 설교자가 되었고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책을 읽고 연구하며,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 이태리어, 불어, 독어 등 언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비록 지저분한 작업복을 입고 두세 개의 못을 입에 물고 일하면서도 그의 옆에는 항상 책이 펴져 있었다. 캐리는 어느 날 갑자기 행운을 만난 것이 아니라 꾸준히 자신의 꿈과 비전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23세가 되던 어느 날 쿡선장의 「마지막 항해」라는 책을 읽으면서 캐리는 선교사로서의 부름을 받았다. 선교를 위한 책은 아니었지만, 책을 읽으면서 “와서 우리를 도우소서”라는 마케도냐인들의 외침을 들었고, 주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고백하였다. 그 후 자신이 만든 세계지도에 각국의 인구, 종교 등 새로운 정보들을 기록하였고, 사람들이 도움을 호소하는 그 지도가 캐리의 기도제목이 되었다. 당시 영국은 캘빈주의 영향으로 선교에 무관심하였고 선교는 초대교회의 사역에 국한시켰다. 이러한 교회 목회자들을 깨우기 위해 캐리는 선교를 역설하였는데, 한 목사님이 캐리에게 “젊은이 그만 열내고 자리에 앉게나, 만약 하나님께서 이방인 선교를 원하시면 자네나 내가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실 걸세”라고 말했다. 그러나 캐리는 용기를 잃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그의 지도에 각국의 면적, 인구, 지리, 종교 등의 정보를 실었다.


인도를 향한 선교 비전을 갖고


1793년 캐리는 인도의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당시 캐리는 결혼하여 세 아이의 아버지였다.  당시 인도는 동인도 회사가 점령하고 있었다. 캐리는 캘커타에서 사역하는 것이 거부당한 채 1799년에 인근 네덜란드령 식민지인 세람포르로 추방되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마침내 1813년에 영국령 인도에서 제한적인 접근을 허락받았으며 캐리가 죽기 전 해인 1833년에 무제한 접근을 허락받았다.)
캐리의 아내와 아이 2명은 이질에 걸렸고 한 아들을 잃게 되었고 아내는 정신병에 걸렸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캐리는 계속 공부하였고, 인디고 공장의 감독으로 취직하면서 물질문제가 해결되어 선교의 기초가 되는 인도어 공부에 집중하였다. 캐리는 윌리엄 워드(William Ward)와 조슈아 마쉬맨(Joshua Marshman)과 함께 전도와 교육, 성경번역, 사회개혁의 사역을 했다. 사회개혁으로는 인도의 폐습인 사티(Sati: 남편의 장례식에서 아내를 태워 죽임)라고 하는 힌두교의 순장의식을 금지시키는 법을 제정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정규 교육도 받지 않았지만 꾸준히 노력하였기에 캐리는 인도에서 대학교수가 되었다. 성경번역은 인도 도착 후 제일 먼저 벵갈어를 번역하였고, 산스크리트어, 힌두어, 마하라스티아어 등의 인도방언들과 미얀마어, 중국어 등 총 44개의 언어로 번역하였다.

성경번역과 관련된 한 일화가 있는데, 어느 날 캐리가 8년 가까이 성경을 번역했던 원고를 강아지가 촛불을 건드리는 바람에 불타 버린 끔찍한 사고를 당했다. 보통사람 같으면 화를 내며 크게 절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캐리는 강아지를 끌어 안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제 원고가 부족하다는 것을 아시고 완전하게 다시 번역하라고 없애신 뜻으로 압니다. 다시 시작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하였다.
캐리는 결코 제자리걸음에 만족하지 않았으며 꾸준히 새로운 시도를 하였다. 인도 청년들과 기독교 가정의 자녀들에게 기독교정신에 입각한 대학교육을 하고 싶어서 대학 설립을 꿈꾸었으며, 1821년에는 아시아 최초의 대학이 완공되었다. 캐리는 인도 선교를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였고, 1834년에 인도 땅에 묻혔다.

인도의 사역영향

윌리엄 캐리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선교사들도 인도에서 사역하였다. 메리 리드(Mary Reed)라는 선교사는 1885년에 인도에 도착했다. 그는 나병환자를 위한 선교활동을 하였는데, 경미한 병을 앓게되어 히말라야 산맥에 있는 나병환자 수용소에서 회복을 위해 갔었다. 그러나, 1890년에 휴가차 미국으로 귀국해서는 문둥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녀는 인도로 돌아가서 1943년 사망 때까지 나병환자 수용소에서 사역했다.
에이미 윌슨 카미클(Amy Wilson Carmichael)은 일본에서 15달 동안 사역을 하다가 1895년 남인도로 갔는데, 그녀의 중심 선교사역은 어린이들이었다. 그러나 1931년에 그녀는 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절름발이가 되어서 경건서적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인도에는 약 900명의 국적을 포기한 기독교 선교사들이 있다. 인도인의 2.5~4% 정도, 즉 약 2천만~3천만 명이 명목상 기독교인이다. 1986년에 인도 교회는 전도자와 교회개척자로 약 4,200명의 인도인들을 파견한 것으로 추산되었다. 이것은 그 이후로 더욱 증가하였고, 주요 교회 개척사역은 인도의 미전도종족 가운데 행해지고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서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