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철야를 마치고 집에 오니 새벽 4시가 조금 넘은 시간.
혹시나 잠들면 일어나지 못할 새라 뜬 눈으로 밤을 보내고 아침 7시 30분에 교회에 도착하였다.
잠들어 오지 못하거나 피곤해 할 사람이 있지나 않을까 하였는데 모두들 얼굴 표정이 밝았다.
믿음으로 아침 일찍 나온 MMTC 훈련생들을 반겨 주시는 듯, 아침 일찍부터 무지개는 저 하늘에 아름답게 떠 있었다.
유아실에서 잠시 모여 일정을 위해 기도한 뒤 차에 올랐다.
준비해주신 김밥과 간식을 나눠 먹으며 용인 순교자 기념관을 향해 출발했다.
철야예배가 마쳐진 뒤 밤을 지새우면서 ‘차 속에서는 좀 잠을 자야 되겠다.’라고 생각을 했었지만, 반장님과 부반장님이 준비하신 은혜로운 레크리에이션과 맛있는 간식, 그리고 가는 내내 그 아름다움을 더해만 갔던 무지개가 쉽게 잠을 이룰 수 없게 만들었다. 1시간 정도를 달려 예상보다 이른 시간에 용인 순교자 기념관에 도착할 수가 있었는데 모든 것이 아버지의 인도하심이었음을 고백할 수 밖에 없었다.
입구에 세워진 타교회의 선교사 숙소(?)를 보면서 앞으로 세워질 가나안 성전에는 이보다 더 아름답고 멋진 선교사 숙소가 세워질 것을 기대하며 초입에서 내려 언덕을 걸어가기로 했다.
길 양 옆으로 늘어선 믿음의 성구, 앞서 가신 선교사님들의 이름과 밑에 적혀 있는 말씀 구절들은 걸음마다 은혜가 되어졌다. 금요철야 예배의 특송 시간에 당회장님께서 특송 팀과 맞춰 불러주셨던 ‘아리랑’ 찬양을 생각하면서 다 같이 찬양을 부르며 올라가니 10~15분여의 시간이 소요되는 언덕길은 찬양 속 가사처럼 어느덧 아리랑 고갯길이 되어 있었다.
부흥이라고 적혀 있는 거대한 비석 앞에서의 기념 촬영 시간, 잠시 동안이지만 ‘부흥’을 이루기 위한 우리의 소명에 대해 생각해 본다. 언덕의 끝에 자리 잡은 순교자 기념관은 하얀 벽면에 아담한 크기의 건물이었다.
아직 개장 전인 이른 시간이라 잠시 산책을 나온 주민(?)2분과 우리들을 제외하고는 다른 이들은 없었다.
기다리는 동안 건물 앞마당에서 우리는 도착을 인증하는 기념사진을 찍으며 잠시 들뜬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마당 한 켠에 자리 잡은 주기철 목사님의 마지막 설교가 적힌 기념비와 박관준 장로님의 유시를 볼 때 들떴던 마음은 어느새 차분해 짐을 느낄 수가 있었다.
또한 ‘예수님이 우리 위해 죽으셨으니 나도 예수님위해 죽겠다.’라고 고백했던 장로님의 고백과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다음에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라며 순교의 그 길을 기꺼이 가신 주기철 목사님을 묵상하면서 죽음 앞에서도 담대히 신앙을 고백했던 그들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려 보았다.
순교자 기념관에 들어가서 처음 보는 큰 그림은 토마스 선교사님의 순교 장면이었다.
27세의 나이에 그토록 간절히 가고자하였던 조선 땅에 발을 내딛자마자 죽음을 당했지만, 그 순교의 피가 결코 헛되지 않음을, 아깝지 않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2층의 예배실에서 도착 감사 기도를 드렸다.
길지 않은 40여 분간의 관람시간동안 선교사님들의 사진을 한 분씩 바라보며 한분 한분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비록 지금은 선교사님들 각자의 삶이 어떠한 은혜가 있는지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저 천국에 가서 꼭 이 은혜를 나누길 소망하는 마음으로 선교사님들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정말 많은 분들이 신앙 안에 순교의 길을 가셨는데, 그 분들의 희생이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되어 이 같은 열매가 되었음에 감사할 수가 있었다.
3층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있었던 전남 무안군 해제면의 해제교회 5인의 순교자 비 사진은 한참 동안 내 마음을 붙잡았다.
당회장님께서 태어나신 무안 땅에도 이처럼 순교자의 피가 남아 있음을 생각해 보니, 도마의 순교의 피가 목자님의 인도성회로 큰 열매 맺었던 일이 생각나 가슴이 뭉클해졌다.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는데 마침 다음 날인 주일 예배 시에 당회장님도 6.25를 겪으셨고, 참혹했던 그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노라 말씀하여 주실 때에는 그 어려움 속에서 목자를 지켜주셔서 지금 이렇게 살아 있는 순교를 할 수 있도록 은혜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 할 수 있었다.
40분간의 관람 이후 진행된 예배는 은혜로운 찬양과 노정욱 목사님의 말씀에 졸음도 방해하지 못하는 은혜의 시간이었음을 고백한다. 무엇보다 사도바울과 사도 베드로께서 순교의 자리에 가기까지 평생 가지고 있었고 헌신의 원동력이 되었던 아버지와 주님을 향한 민망함 들이 어떻게 내 삶에도 적용이 될 수 있을 것인가는 내게 주어진 하나의 숙제가 되었다.
오전시간 동안의 관람을 마치고 점심시간에는 용인휴게소에서 튀김우동과 충무김밥을 먹으며 잠시 동안 오랜만의 따스한 날씨를 누릴 수가 있었다. 교회버스는 다시 도로를 달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으로 향했다. 양화진은 이번이 3번째 방문이었다. 벌써 5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병원 당직을 서고 난 뒤 받은 잠시 동안의 오프시간에 처음 양화진을 찾았었다.
특별한 이유 없이 그냥 한번 와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양주에서 이곳까지 찾아왔었다. 그때는 지금의 홍보관도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또한 안내 봉사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홀로 선교사 묘원을 누비며 사진을 찍고, 사색을 했던 지난 5년 전의 젊은 내가 떠올라 잠시 웃음 지을 수 있었다.
오후 3시경 도착한 우리는 3시 30분부터 방영되는 동영상을 약 40여 분간 관람하였다. 이곳에 외국인 선교사 묘원이 생기게 된 경위와 이곳에 묻혀 있는 선교사님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저들은 어떻게 이 낯선 땅에서 생명까지 줄 수 있었나?’라는 생각이 마음 가득하였다. 동영상을 본 뒤 나간 묘원은 강바람이 서늘하게 불어와 옷깃을 저미게 만들었다. 안내 봉사하시는 분들의 인도를 따라 동영상에서 보았던 선교사님들의 묘비와 그 분들의 삶과 행적들에 대해 설명을 들으며 양화진의 곳곳을 누볐다.
특별히 나와는 관계가 있는 연세대학교와 세브란스병원의 시작이 된 에비슨 선교사님,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가족이 함께 잠들어 있는 곳을 지날 때에는 그 분들의 수고에 대해 마음 깊이 감사할 수 있었다. 많은 초기 선교사들 중에 특히 의사가 많다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또 다시 이 분들의 헌신과 수고를 생각하며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볼 수가 있었다.
묘원에서 잠시 따로 흩어져 사색할 수 있는 시간이 없어서 조금은 아쉬웠지만, 그 아쉬움을 달래며 다음에 찾아간 곳은 홍보관이었다. 어두웠던 선교초기 상황을 고려해서 입구를 캄캄한 동굴처럼 만들었다는 설명과 함께 ‘하나님이 이 조선 땅을 사랑하사 선교사를 보내셨다.’라는 글귀는 새삼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아 지금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깊이 새길 수 있게 해주었다.
통로를 따라 이어진 여러 가지 멀티미디어 기구와 선교 사진들을 보면서 ‘장차 가나안 성전이 지어지면 만들어질 역사관(?)은 얼마나 멋있을까’라는 생각은 기쁨을 더하게 해주었다. 홍보관을 나오니 태양은 저 언덕 너머로 조금씩 저물려 하고 있었다. 저물어가는 태양처럼 숨 가빴던 MMTC 선교 역사지 탐방은 교회를 향하는 버스 안에서 마무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성결의 복음을 들어보지도 못했고, 천국에는 새 예루살렘도 있고, 3천 층도 있다는 것조차 몰랐지만 기꺼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아끼지 않았던 믿음의 선진들을 생각하며 또 다시 게을러지려 했던 나를 채찍질 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을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영광을 올리며 1일 선교 역사지 탐방을 마칠 수가 있었다.